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한영 암살 사건 (문단 편집) === 마지막 통화 === [[파일:9041dc05dfbcf3a25520941695e957c265f459a25aabe2e417f73463eb022bf3919c171927481b2b93a3684b6378728c888392da49850606bb522708a69127eae3008460a734eb53bfa5b2545fa7e9c0e57fa73baf5c00d6f59222ec651cd85f.jpg]] * '''1995년 12월 20일 통화''' >성혜랑: 여보세요. >이한영: 알로(러시아 인사말), 엄마. >성혜랑: 별일 없지? 지난번에 통화할때 너 망했다는 거, 그거 얼마나 무서운 거냐? >이한영: 사업하다 망한 거요? >성혜랑: 그거 얼마나 무서운 거냐. 살아날 수 있어? >이한영: 그럼요. 죽고 살고 문제는 아니고,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사업을 크게 벌렸다가 그렇게된거에요. 그냥 평범하게 직장생활하고 그랬으면 됐는데. >성혜랑: 얘 자신없으면... 내가 그 사회를 좀 알잖니. 생존경쟁이 얼마나... 그러지 말고 직장 안전한데 들어가서 조용하게 살렴. >이한영: 그러려고 해요. 정리할 것도 좀 정리하고 러시아어를 하니까. 여기선 러시아하고 무역을 많이 하거든. 그래서 러시아하고 무역하는 회사에 취직하려고 그래요. 외할머니 어디에 묻히셨어요? >성혜랑: 할아버지 옆에. >이한영: 할아버지가, 거기가 어디였지? 평양근교였던것 같은데. >성혜랑: 평양시 용성구역 말암리야. 그때 가봤지? 할아버지 옆에 크게 잘했어. >이한영: 파파(김정일)가 장례식은 잘 해주셨어요? >성혜랑: 화장했으니까 그렇게 해줬다고 보겠나? >이한영: 잘해준게 아니구나. 살아계실때도 서운하게 해주셨는데. 통일되면 가볼수 있을텐데. >성혜랑: 묘주에는 몽이(성씨의 오빠 성일기씨의 옛 이름)라고 썼다. 할아버지 묘지에는 몽이, 혜랑이라고 썼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렇게 썼어. >이한영: 할머니 나 여기 있는줄 알고 돌아가셨어요? >성혜랑: 내가 말안했어. 놀라실까봐. 삼촌 살아계신줄은 알고. >이한영: 엄마나 이모가 많이 괄시 받고 있나? >성혜랑: 그런셈이야. 누가 감시가 붙었다고. >이한영: 감시가 아니고 괄시, 괄시. 왜냐하면 방치코(김정일의 세번째부인 [[고용희]])도 있고, 그 아들이 제네바국제학교에 다니고, 그렇게 떵떵거리고 살면 상대적으로 이모나 엄마가 천시받고 사는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성혜랑: 그건 당연하지. 다만, 그대로 아예 살게 내버려두고 여행을 하겠다고 그러면 아무말도 하지 않고 눈감아 주고 그정도지 뭐. >이한영: 돈 같은 건 제대로 보내줘요? >성혜랑: 보내줄 돈이 어디 있니? >이한영: 돈안주면 어떻게 거기서 생활을 하고 살아가? >성혜랑: 원래 있던 거. >이한영: 아, 이모가 옛날에 조금씩 꼬불쳐놨던 것... 그거 다 까먹으면 어떡해?... >성혜랑: 죽으라고 하겠니, 설마? >이한영: 그런 상태예요? 나는 그래도 대장(김정남)이 있으니까... 대장이 장손이고 장남이고 그러니까 대장 봐서라도 이모한테는 함부로 안할줄 알았거든. >성혜랑: 더 가혹하게 하려면 할 수도 있는 처지지. 그 여자([[김정은]]의 어머니 고용희)가 세도가 대단하니까. 그래서 무관심하고 모른척 한다. >이한영: 그러면 대장이 장손인데 후계자로 생각 안하나요? >성혜랑: 아직 자기 자신(김정일)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그런 문제 논의 하겠니? >이한영: 여기서는 초대소에 갇혀있는 걸로 그렇게 났더라? >성혜랑: 맞지 뭐. 몰래 그러고 나와 다니지. 갇혀있고... >이한영: 대장은 그럼 자기 엄마니까 이모한테는 가끔 왔다갔다해요? >성혜랑: 얼마전까지는 했댔어. 한 3~4년 전까지는. 3년전부터는 전혀나오지 못하는구나. >이한영: 도망갈까봐 그러는건가? >성혜랑: 모르지. >이한영: 어렸을때는 참 그렇게 귀여워하고 장차 후계자로 여기시고 그러는 것 같더니... >성혜랑: 그렇게 변하더라. >이한영: 내가 많이 망설였었어 사실... 그런데 내가 지금 통화를 안하면 엄마나 이모하고 영원히 통화가 안될수도 있고 또 전화번호가 혹시라도 바뀌면, 그러면 연락이 전혀 끊기면 정말 언제 볼수 있을지, 통화라도 할 수 있을지 사실 막연하잖아요. >성혜랑: (울먹이며)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내가 10년을, 10년을 너는 한번도 안걸었댔니? 그저 어쩌다가 그게 혹시 네건가 하고... 10년을 어떻게하다 그렇게 기다렸다. 그런데 한번도 안했니? >이한영: 내가 옛날 전화번호가 그대로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엄마, 할머니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어? >성혜랑: 할머니, 건강하시고 백세까지 사신다고 그랬는데 너무 속이 상해서 뇌혈전으로 돌아가셨어. >이한영: 속상했다는 건 정남이 문제, 뭐 그런 건가? >성혜랑: (울먹임) 그럼. 아니면 더 계속 사셨을텐데. 용기를 잃지 말아. 아직 젊잖니. 용기를 잃지 말아. >이한영: 엄마 걱정마세요. 나는 어려도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 >성혜랑: 나는 네가 참 잘됐다고 생각해. >이한영: 평양에 있었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성혜랑: 글쎄말이야... 글쎄말이야... 두 아이가 다 거기에 갇혀있잖니? >이한영: 두 아이라니? >성혜랑: 남옥이. >이한영: 남옥이도 못나오나? >성혜랑: 울타리 때문에 나오지도 못해. 울타리안에서 어떻게 사니?... >이한영: 그럼 정말 둘이 갇혀있나? >성혜랑: 남옥이는 옛날 우리집 호두나무집에 있어. >이한영: 그럼 대장 옆집 거기 있고? >성혜랑: 응. 아이들이 갑갑해서 죽지 뭐. >이한영: 어렵고 고생되더라도 여기가 좋아요. >성혜랑: 그렇지, 그래. >이한영: 여기와서 느낀 거지만 거기 정말 잘못하고 있어. 엄마도 느낄거야. >성혜랑: 아휴, 말할 수 있니... 도대체 기가 막히고 목이 메어서... 그런데 10년전도 옛날이다. 지금은 더해. 제사때나 명절이라며 들어오라고하면 병원에 들어갈 작정이다. 피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잖니? >이한영: 남옥이는 그럼 거기서 어떻게 하나? >성혜랑: 거기 있는한 어떻게 결정적인 대책을 강구하겠니? 어떡하든 나오도록 수를 쓰는데 그게 잘 안된다. >이한영: 어떻게든 남옥이를 밖으로 끌어내요. >성혜랑: 내가 기회를 노리는 것도 그거야. >이한영: 여기서 사진 보니까 파파도 많이 늙으셨던데... 건강은 해요? 어디 아파보이던데요? >성혜랑: 좀 그렇기도 한 것 같아. 하도 비밀, 비밀이라서... >이한영: 그것도 비밀이에요? >성혜랑: 우리가 아니? 몽땅 비밀이야. >이한영: 옛날처럼 대사관도 편의 봐주고 그래요? >성혜랑: 고작해야 비행기표나 사주는 거지, 뭐. >이한영: 대사관이나,옛날처럼 하부기관에서 달러 아부(뇌물) 안하나? >성혜랑: 달러가 얼마나 귀한줄이나 아냐? 알잖니, 우리나라 사정이 어떻다는 걸. 여유가 누구에게도 없어.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 이모가 저축한 것 가지고 너끈히 살수 있어. >이한영: 얼마나 저축했어요? 몇백만달러 정도 저축했어요? >성혜랑: 평양에서 먹는 것과 옷같은 것 대주니까 그걸로 살지. >이한영: 저번에 통화한 손주 알지? 비디오로 담아놨으니까 보내줄게요. >성혜랑: 그걸 어떻게 여기서 보니? 관료들 다 있는데. 그 전화 괜찮니? >이한영: 그쪽에서만 괜찮으면 괜찮아요. 그게 제일 걱정이야. >성혜랑: 여기는 까치들이 다 도청을 하잖니? >이한영: 까치가 뭐야? >성혜랑: 네가 이름붙인 거잖아. KGB말이야. 까치들이 다 듣고 있는데 24시간 다 들어. 그런데 러시아하고 우리(북한)가 사이가 안좋아. 어떻게든지 우리 모여서 살 궁리를 하자. >이한영: 내가 부도가 나서 감옥에 갈뻔했었는데 국가에서 다 관대하게 해결해 줬어요. >성혜랑: 아, 고맙구나. >이한영: 집도 사줬었어요. 내가 어떻게 사요... >성혜랑: 그래, 일자리 있니? >이한영: 있죠. 당국에서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줬는데 방송국 프로듀서라고 기자 같은 거예요. >성혜랑: 너 원래 글쓰는 재간 있잖니? 아, 수입이 좋은 그런 곳에 알선도 다 해주는구나. >이한영: 여기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외삼촌이 해외를 왔다갔다 할수 있을 정도인데요. >성혜랑: 내가 글을 쓰지 않니? 내가 꼭 쓰려고 하는 주제가 있잖니? >이한영: 엄마가 글을 쓰려고? >성혜랑: 이미 썼는데 여기서는 발표하기 곤란해. >이한영: 엄마가 쓴 글을 그쪽에선 발표하기 곤란하다고? >성혜랑: 그래. 난 그래서 그런거 건강이 허락하는한 죽기전에 완성하려고 한다. >이한영: 그럼 엄마가 들어가지 않고 그런 글을 여기서 받으면 돈벌이가 되는데. >성혜랑: 얼마든지 그거야 알지. 그러나 내가 저쪽과 인연을 끊지 않으면 곤란하지. 희망을 가지고 안전한 직장에 가서 조용히 살아라. 엄마 살아있단다. 엄마 그렇게 무능하지 않단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라. 엄마는 글을 써서 먹고 살려고 작정하고 있어. >이한영: 응, 그래? >성혜랑: 엄마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알아. 내가 쓰면 세상에서 희귀한 글이 될 거야. >이한영: 제3세계에서 엄마가 문필활동을 하면 아마 돈 많이 벌거야. 엄마만의 고유한 것들이 있잖아. 그동안 많이 느꼈던 것. >성혜랑: 그래 내가 쓰는 것은 소설이 아니고 실제 일이야. >이한영: 그럼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 수 있겠네. >성혜랑: 글쎄 말이야, 글쎄 말이야. 너 희망가져라. 나는 제3세계에 가서 책을 낼거야. >이한영: 그러면 남옥이를 빨리 불러내야죠. >성혜랑: 그럼, 빨리 불러내야지. 정남이야 제 아들인데 죽이기야 하겠니? 전화비 많이 나오겠다. 백달러는 되겠다. >이한영: 백달러? 엄마가 그렇게 어려워? >성혜랑: 너희들은 백달러가 안 크니? >이한영: 여기서는 백달러 우습게 알아요. 흔해요.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222222222.jpg]]}}}|| || 1996년 2월 중순 처음 신상이 공개된 이한영의 모습. || * '''내용 종합''' 서로를 보지 못한 기간이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연락이 닿은 모자는 서로 숨죽이며 10월 20일부터 12월 20일까지 두달간 약 30여차례의 통화를 했던것으로 전해졌다. 이후에 연락을 끊은 이유는 망명 이후에는 연락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성혜랑은 1995년 12월초 평양을 다녀온 뒤 서울의 아들 이한영과 가진 국제전화에서 "방치코(코가 망치날처럼 생긴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에 대한 성혜림 일가의 은어)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 방치코는 우리 자매를 잡아먹으려고 난리다. 꼬투리가 잡히면 아오지 탄광에 보내겠다며 해외공관원들을 들볶고 있다. 이 때문에 이모(성혜림)의 증세가 더욱 악화돼 동행키로 마음을 돌렸다"고 이한영씨에게 전했다. 평양 음악무용종합대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1972년 만수대예술단 단 원이 된 고용희는 김정일이 주말에 여는 측근자 파티에 기쁨조로 나왔다가 김정일의 눈에 들었다. 1979년에는 창광산 관저의 안주인이 됐다. 창광산 관저는 본래 성혜림씨가 15호 관저(김정일 공관)와 함께 소유하다 고용희에게 빼앗겼다. 한편, 1974년에 셋째 아내가 된 김영숙은, 넷째 고용희 등장후 창광산 관저보다 못한 서장동 관저에 살고 있다고 한다. (김정일은 비공식적으로 수십명의 부인이있다. 공식적 첫째부인: 홍일천, 둘째부인: 성혜림, 셋째부인: 김영숙, 넷째부인: 고용희) 고용희가 김정일을 독차지해 김정일이 서장동 관저를 찾는 것은 김정일과 김영숙 사이에서 태어난 딸 김설송을 만나러 가는 때뿐이라 한다. 평양 김정일공관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30상자씩 보내주던 쌀, 고추장, 된장생수, 과일, 건어물, 인삼 등 부식물도 수행원의 조그만 잘못을 빌미로 공급중단됐다. 성혜랑-성혜림 자매는 또 아버지 성유경씨가 82년에 사망하고 정신적 기둥으로 삼았던 어머니 김원주씨마저 1994년 11월초 사망하자 북한생활에 미련을 버린 것으로 보인다. 성혜랑씨는 아들과의 전화에서 모친 김원주씨 사망원인을 "고용희 일가의 세력확장에 있어서 이에 미래에 잇따를 손자 [[김정남(북한)|김정남]] 후계구도 문제로 속이 상해 돌아가셨다" 고 하면서, "어머니(김원주) 생각이 날까봐 평양에는 의식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고 말했다. 성혜랑씨는 첫 국제전화에서 아들이 "어떻게 하면 엄마를 볼수있어?" 라며 엄마를 보고 싶다고 하자, "볼수 있어. 우리 볼 수 있다. 볼 수 있게 지금 하려고 그래" 라고 말했고, 아들 이씨는 "엄마를 만나러 모스크바에 가겠다" 고 하자 "기다려라. 지금 내가 시도하고있다" 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국 후 생활에 대해서는 "내가 체험했던 북한생활을 작품으로 발표하면 먹고 사는데는 불편이 없다"며 작가생활을 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1995년 11월 중순 모스크바 코스모스 호텔에서 서울에 살고있는 친오빠 성일기씨를 만난 성혜랑씨는 한국에 갈 경우의 처우문제와 신변안전에 대해 물어보고 "평양의 남옥이(자신의 딸)를 데려와야 하므로 시간이 걸린다. 평양에서 설(신정)을 쇠라는 김정일의 요청에 따라 12월말쯤 평양에 들어가 설을 쇠고 1996년 1월 20일쯤 남옥이를 데리고 모스크바로 나가 1월말쯤 제3국으로 가겠다" 고 말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성혜림씨의 오빠는 가족이 북으로 떠난 이듬해 자진 월북,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6.25동란 하루전에 미리 남파돼 경남-북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1953년 체포돼 전향했다. 한편, 성혜림씨의 아들 김정남은 1996년 1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중국 방문에 나서는 등 대외 활동을 시작하면서 고용희와 갈등이 일어났는데, 성혜랑씨는 "정남이가 아직 힘이 약해 우리를 돌봐줄 수 없다" 고 전했다. 한편, 성씨는 96년 1월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아버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중국 시찰에 나서 공식적인 대외활동에 착수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94년 2월경 김정일이 「김정일 처남 서울에 살고있다」는 기사가 실린 94년 1월 20일자 주간조선을 식사자리에 들고와 관저 암호명 「15호」가 어떻게 노출됐는지 추궁했다는 사실 등을 아들 이한영과의 모스크바-서울간 국제 통화에서 밝히는 등 김정일에 관한 고급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한국의 매체를 꾸준히 접하는 김정일이 이씨가 귀순후 안기부에 건네준 자료를 접한뒤 "어지간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가 어떻게 새어나갔을까" 여간 궁금했던 모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